“판사는 국민 위에 있는 존재인가요?”
어느날 누군가 조용히 던진 이 질문은
법치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를 멈춰 세웁니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판결,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왜 좀처럼 책임지지 않으며,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의 사법부
우리나라의 법관 임용 구조는
말 그대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을 위한 좁은 문입니다.
- SKY 대학 출신의 로스쿨 졸업생
- 사법시험 또는 변호사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사람
- 사법연수원(법원실무연수)에서 성적 상위권
- 이후에도 폐쇄적 평가와 인사 시스템을 통과해야 판사가 됩니다.
이 과정은 공정한 경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한정된 배경’과 ‘특정 인맥’이 구조화된 통로입니다.
결국, 판사라는 자리는
학벌과 성적, 권력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사법관료집단의 소유물이 되어갑니다.
🧱 법원은 ‘닫힌 성’… 외부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민은 때때로 분노합니다.
부당한 판결, 엉터리 양형,
그리고 끊이지 않는 사법부 비리.
하지만 법원은 말합니다.
“판결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사법 독립을 침해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잘못된 판단조차도 보호받아야 하나요?
이 말은 사실상,
“우리는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 밖에서 뭐라 하지 마라.”
라는 선언과 다름없습니다.
사법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만의 언어로,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자신들만의 권위를 지켜냅니다.
🙈 “국민이 이해 못 하면 어쩔 수 없다”는 태도
판사들은 때때로
“국민은 판결의 맥락을 잘 모른다”고 말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우리는 설명할 의무가 없다”는 오만입니다.
사법은 시민에게 설명되어야 하고,
시민은 사법을 감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판결에 대한 대국민 해명은 드물고,
담당 판사나 법관은 대부분 익명 속에 숨습니다.
판결을 비판하면 ‘법알못’이 되고,
비판의 목소리는 ‘감정적’이라며 묵살당합니다.
🕳 우리는 왜 사법부에 질문조차 하기 어려운가
입법부는 선거로 심판받습니다.
행정부는 정권 교체로 바뀝니다.
그런데 사법부는?
선거로 뽑지도 않고, 임기 중 견제도 거의 없습니다.
판사는 해임되기 어려운 독립된 신분을 가지며,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은 고위 정치권력자들에 의해 임명됩니다.
결과적으로,
국민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창구는 거의 없습니다.
사법부는 스스로 정화하지 않는 이상,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구조를 유지하게 됩니다.
🌱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법’이 정의롭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법을 다루는 이들이
정의에 무관심하거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법은 흉기가 되고, 불공정은 시스템이 됩니다.
🤲 몸맘케어의 바람 — 판사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몸맘케어’는 인간 중심의 시선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법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엄격한 판결이 아니라,
따뜻한 정의와 열린 책임을 바라는 시민입니다.
판사는 절대자가 아닙니다.
그 역시 시민의 대표요, 국민의 봉사자입니다.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있으며, 책임을 져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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