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하겠습니다.”
뉴스에서, 드라마에서, 심지어 일상 대화 속에서도 자주 들려오는 말이다.
그 말은 종종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왜일까.
우리가 말하는 ‘법’은 정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을까?
📉 ‘법대로’는 누구를 위한 말인가
“아들이 사람을 죽였는데도 집행유예?”
“수억 횡령한 기업인은 풀려나고, 편의점에서 생리대 훔친 사람은 구속?”
“명백히 잘못된 판결인데, 누가 책임지나?”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판사는 말한다.
“법대로 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법이 공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법을 적용하는 방식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 법의 칼끝은 왜 약자를 향하나
서민은 작은 잘못에도 엄격한 심판을 받는다.
생활고에 쫓겨 잠시 눈을 돌리면,
그 순간이 ‘범죄’가 된다.
반면,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고급 변호인을 선임하고,
시간을 끌고, 증거를 없애고, 판례를 해석한다.
같은 법 아래,
누군가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웃는다.
법이 평등하다는 말은 종이 위의 이상일 뿐,
현실에선 언제나 계급을 타고 흐른다.
👨⚖️ 판결은 사실 ‘사람’이 내리는 것이다
사건의 기록은 아무리 객관적이라 해도,
그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 — ‘판사’ — 는 인간이다.
그도 실수하고, 편견이 있고,
경험과 배경이 그 사람의 판단을 만든다.
문제는,
그 ‘한 사람의 판단’이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다는 데 있다.
판결 하나가, 생계를 무너뜨리고
가족을 해체하며
한 인간의 존엄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판결, 정말 정의로운가?”
🔍 법이라는 언어의 권위, 그리고 그 그림자
법률 문장은 어렵다.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이해하긴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전문가의 영역, 곧 권력의 영역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내가 뭘 알아… 법이 그렇다는데.”
“판사가 그렇다잖아.”
이런 무력감은 사법 권력의 오만을 자라게 만든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불공정은 ‘정당한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숨는다.
💡 우리가 바라는 정의는 따뜻해야 한다
‘정의’는 단지 판결문 속에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다.
정의는 누군가에겐 생존의 문제고,
누군가에겐 용서와 회복의 기회이며,
어떤 이들에겐 억울함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울타리다.
그렇기에,
법은 정교해야 하되 따뜻해야 하며,
판결은 냉정하되 공감의 온도를 가져야 한다.
🌱 몸맘케어, 정의를 다시 묻다
‘몸맘케어’에서 이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몸을 돌보듯, 마음을 어루만지듯,
이 사회의 구조와 제도를 따뜻하게 성찰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의롭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세상의 불공정에 질문을 던지는 용기 속에 있습니다.
구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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