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느 날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정의의 저울을 쥐고 있는 사람은 과연 공정할까? 그는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온 사람일까? 아니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 법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살아온 존재일까?
우리는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뽑는다.
지방자치단체장도, 교육감도, 심지어 동네 통장까지도 선출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유독 판사는… 뽑지 않는다.
왜일까?
🧭 선출되지 않는 권력, 사법부
대한민국에서 판사는 시험과 성적, 그리고 추천과 임명의 절차를 통해 선발된다.
국민은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단지 '법에 따라' 내려진 판결을 결과로서만 받아든다.
“이게 과연 공정한가?”
“판사도 국민의 위임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사법부는 삼권분립의 한 축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국민의 삶을 직접적으로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판사는 선거를 거치지 않기에, 책임질 상대가 없다.
🎓 엘리트 중심의 사법 구조
우리나라의 판사 대부분은 SKY 대학의 법학과나 로스쿨을 거쳐,
사법연수원에서 상위권 성적을 받고, 임용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선택받은 법조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현실의 어두운 골목이나 서민의 삶과는
자연스레 거리가 생긴다.
과연 이들이 내 삶의 고통과 억울함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 판사는 왜 국민이 뽑지 않나요?
일부 나라에선 선출 판사 제도가 있다.
미국 일부 주에서는 판사도 시민들이 투표로 선택하며, 임기가 끝나면 다시 평가받는다.
물론 단점도 있다.
정치적 편향, 인기영합주의, 전문성 약화 등의 위험.
하지만 우리처럼 판사 개인의 성향이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 판단이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사회라면,
적어도 사법권력에 대한 민주적 감시와 견제는 필요하지 않을까?
선거가 아니더라도,
시민의 감시, 판결 공개, 국민 참여 재판 등
민주적 정당성을 보완할 제도적 장치들이 더 적극적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 정의의 얼굴은 따뜻해야 한다
판사의 눈은 차가울 수 있다. 법의 잣대는 때로 냉정해야 하니까.
하지만 정의는 단지 ‘법률’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정의는 사람 냄새가 나야 하고,
그 안엔 눈물도, 분노도, 연민도 녹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사법부는
법만 잘 아는 판사가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는 판사, 책임질 줄 아는 권력,
그리고 국민의 눈높이를 의식하는 정의다.
🌱 몸맘케어, 마음을 치유하는 정치적 질문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몸과 마음의 치유를 이야기하는 이 공간 ‘몸맘케어’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구조, 즉 ‘정치’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질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법부를 원하고 있는가?
정의는 누구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하는가?
답은 아직 없다.
하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정말 따뜻한 얼굴의 정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구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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